유럽의역사: 중세교회개혁에 관해...


안녕하세요,  중세유럽의 교회개혁에 관한 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하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무었이 궁금하여 이페이지에 오셨습니까?  
 
독일은 성이 많고 유럽은 성당이 많다?
카톨릭교회는 안좋은 것이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 부터 재 탈환하려는 전쟁이었다?
서유럽은 카톨릭이 많고 터키, 그리스, 러시아는 정교회가 많다?
개신교의 시작은 15세기이다?
 
이런 몇가지를 기억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중세시대 모습을 역사와함께 소개하여 드리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교리와 예식, 그리고 성경은 하루아침에 어느누구에 의해 생겨지지 않았습니다. 구약은 여호아의 언약 이라고 합니다. 신약성서가 완성될 때까지는 수많은 교파간의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수 없으며 이마저 모자라 황제가 바뀔때마다 그의 뜻대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완성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편찬을 했다는것보다는 나아가서 우리의 삶에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받아 드리는것 일것입니다.  역사가 있기에 오늘의 세계와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배워야 할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성경에 입각하여 경건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 우리는 신학역사상 몇번없어던 장르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다듬어 졌는지를 당시상황들을 현장을 답사하며 몸소 채험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부활후 끔찍했던 로마의 핍박속에 갈팡질팡하지않고 견뎌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빠른기간동안에 확립되었던 기독교의 교리는 근 300년이 지나 콘스탄틴대제에 의해 니케아에 소집되었던 애큐매니컬 공의회에의해 삼위일체론과 함께 성립되었고 이때를 기해 성경이 한권의 책으로 엮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속의 기독교는 매번 황제의 집권도구로 편리하게 재편되었고 황제보다 우월한 위치를 고집했던 교황은 예수님의 진리를 올바르게 전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어느세 세속적이고 타락의 산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총 일곱차례의 공회의를 통해 기독교를 올바르게 가르켜야겠다던 카톨릭과 동방교회는 교회의 수장이 누구인가를 두고 급기야 갈라졌고 그 분열의 씨앗은 이방인의 계책에 휘말려 수백년간 교회를 이용한 사탄의 역사마저 제조한것입니다. 십자군의 이야기와 필레오케가 좋은 예입니다.
 
이런것들은 신앙인들을 늘 탐욕과 권력의 재믈로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7세기 신의계시를 받아 모하메트가 탄생시킨 이슬람이 눈깜작할사이 거대한 종교집단이 되어 기독교를 무너뜨리려 유럽으로 세력을 넓혀나가는 상황에서도 타락, 부폐, 그리고 그것을 부도덕하게 유지하려는 교회와 교황의 권력탐욕은 해가 거듭할수록 죄에 마취되어 급기야 무지했던 백성들에 죄사함의 명목으로 돈의 액수의 가치에 따라 소위 천국행티켓라는 면죄부까지 만들어 무지한 백성들에 팔았던것입니다.
 
이러니 교황자리와 교회란 얼마나 막강했어야 했는지를 이해가 되실것입니다.  15세기에 악명높았던 교황들중 알렉시우스6세는 프랑스전체를 살수 있는 돈을 동원하여 교황직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이런 교회모습은 당시 모든이들이 받아드렸던것은 아니었습니다. 14세기의 프라하, 즉 보해미안시대, 교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비로 잡겠다 나선 요한후스는 너무나 시대에 앞섰던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다 교회에 의해 장작불더미에 올라 45세란 젊은 나이에 화형을 당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15세기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개혁운동의 씨앗이 되었고 이를 가만이 두고 보지 못했던 후스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자들로 구성된 지식인과 신앙인들에 의해 교회를 상대로 15년간의 후스전쟁을 이끌어 그의 사상을 다음새대가 실현시킬수 있는 발받침대를 만들어 줍니다
 
중세기는 교회가 세상에게 철저한 복종과 믿음을 강요했던 시대이자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확장이 진행될때였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미친듯이 지배할때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리를 남용하였고 이를 반대 또는 정정하려는 사람들을 이단이라 정해 파문하기를 수없이 합니다.  도미니크와 프란시스같은 순결한 수도사들이 일어나 세상을 바로 잡고자 시작한 운동마저 교회는 이를 악용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종교재판으로까지 이르게 했지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무렵의 로마와 스페인종교재판을 얘기하는것 입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마저 이단으로 치부한 한대목만 보더라도 당시의 교회가 권력유지를 위한것이었다면 무한적인 희생을 강요했단것을 이해하실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 교회가 권력과 세속적인 정신를 유지하기위한것이었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돈을 목적으로 했던 행위들였습니다.
 
이런 칠흙속의 암흑같은 16세기초 1517년 독일의 한 젊은 어거스틴수도사는 교회가 남용하는 신앙과 교리에 대해 그누구에 앞서 날카로운 지적을 합니다.  무었보다 이 수도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서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예수님게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습니다.  "믿음만으로, 은혜만으로, 성서만으로!"(sola fide,sola gracia, sola scriptura) 이라는 유명한 마틴푸터의 이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믿는 신앙이 밑천이 된것입니다.  나아가서는 95가지 교회의 타락을 공개하며 믿음은 말씀이 근원이어야 한다며 교황과 교회의 타락한 주체를 흔듭니다.
 
이렇게 교회의 모순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다 결국 루터는 1521년에 당시교황이었던 요한3세에 의해 파문까지 당합니다. 당시로서는 비정상적인 사람이지 않고선 감이 엄두조차 낼수 었었던 엄청난 사건의 불씨를 지핀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사람이 시작할수 있으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배경에 있었기에 동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파문을 피해 발르트부르크성에 숨어지냈던 10개월은 성경을 번역할수 있었던 기회였고 이 번역문을 일반인에 읽힐수 있게 할수 있었던 기회는 구탠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의 덕이었습니다. 또한 멜란히튼같은 당대 거물급 학자이자 신학의 도움을 받아 종교개혁운동을 통한 복음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투쟁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약 75년후인 조선의 중종때의일이지요.
 
급기야 억압과 죽음의 공포속에 대꾸조차 할수 없었던 시대는 이제 문이 뜨이기 시작했고 이를 막기위해 교회는 트렌트공의회까지 동원하여 교회가 기독교의 유일한 세습자이며 교리의 근원이라며 이 운동을 막아보려 합니다. 이런 교회의 움직임은 15세기와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재판으로 이어져 타락과 공포정치의 최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천년전 콘스탄틴대제가 교회와 교리를 정리하여 성경을 완본시켰다면 이시대는 교회가 정치에서 분리되어 믿음과 말씀만으로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가르킨 때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때 츠빙글리라는 취히리의 목사이자 학자가 나서서 다시한번 스위스를 흔듭니다. 교리는 인정하지만 교회가 타락하여 돈에 대한 탐욕이 종횡무진하는것을 개탄하며 그리스도의 진리는 성서밖에선 찾을수 없다며 이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을 합니다. 재세례파를 이단으로 정하였고 예배의식을 형식적임 미사에서 성만찬의 중요성을 역설 정 예배에 정착시킵니다.  또한 이학자는 전쟁의 무서움과 잔인성을 고하며 당시 흔했던 용병제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재합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을 저지해야 했던 인근 연합세력은 급기야 카펠지역을 공격 무력진압을 시도했고 이를 막으려던 츠빙글리와 스위스의 개혁파들은 이전투에서 전사함으로 그의 후배였던 요한캘빈이 그의 개혁을 이어받게 됩니다.
 
1507년 요한칼빈은 프랑스파리에서약 한시간떨어진 북쪽의 철저한 카톨릭도시인 노용에서 마틴루터보다 약 20년뒤 태어납니다.  아이라니컬하는것은 그가 오늘날에 이르게 만들어준 개혁사상이 아직도 노용에 찾을수가 없을뿐더러 개신교 교회한곳이 없다는것입니다.
 
루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개혁의 목소리를 냈던 요한 칼빈은 일찍이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피난하여 제네바를 중심으로 신정정치까지 베풀며 루터의 개혁과 양대 주류를 이루는 개혁을 추진시켰습니다.  지금의 교회행정제도가 토대가된것 역시 칼빈이 채택한 장로제도입니다.  당시 시의회가 교회와 유착하여 의회에 의해 목사를 임명하고 그릇된 설교의 내용이나 예배의식을 강요하던때 그는 정치와 교회의 분리를 이끌어냅니다.  1536년에는 참된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회와 국가를 변혁시키기를 바라는 강한 열정을 집필한 기독교강요를 소개합니다.
 
이런 칼빈의 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성서적인 예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절대 복종, 장로제도 등을 이번 여행을 통해 다각적인면에서 보십시요.  사실이지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개혁의 시작이었지 찬란한 완성이 결코 아닐것입니다.  왜냐면 르네상스시대에서 바로크시대까지 개신교간의 이데올로기전쟁과 인권유린은 루터가 원했던것과는 너무나도 반대적인 결과를 빚어내었고 오늘날에도 개혁이란 명분아래 현대사회에도 진행중인 타락과 나쁜행습이 또다시 시대에 마추어 성행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서는 교포사회와 교회, 좀더 나아가서는 흐르지 않은 물과같이 고착된 내자신과 성전을 되돌아보는 값진 배움의 여행이 되실수 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15-16세기 종교개혁의 기수들이었던 흐스, 루터, 츠빙글리, 재침례파, 칼빈에대해 약간의 지식과 당시역사를 습득하시어 두시면 백배, 천배이상의 보람을 느끼실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필라하나투어
조성종 지음


 



다음은 독자들에 역사의 연대를 표기하여 이해를 돕기위해 만들었습니다.

 

한국역사

년도

유럽역사

고려 우왕 즉위

1372

후스: 출생 (정확치 않음)

조선건국

1392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남, 정종즉위

1398

구텐베르크출생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태종즉위

1400

후스: 로마카톨릭사제

신문고 설치

1401

후스: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어 종교개혁을 제창.

 

1414

콘스탄스종교회의

 

1415

후스: 사망

조선 세종 즉위

1418

 

이종무 쓰시마 섬 정벌

1419

후스: 후스전쟁시작

 

1431

잔다르크 화형에 처해짐

장영실 측우기 설치, 양수표 세움.

1441

 

세종대왕 훈민정음 반포

1446

 

1450년 조선 문종 즉위

1450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성서 인쇄

김종서《고려사》 136권을 개찬

1451

 

조선 단종 즉위

1452

 

계유정난 일어남

1453

동로마 멸망

조선 세조 즉위

1455

장미전쟁 발발

사육신(死六臣)사건

1456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 유배. 죽임

1457

 

 

1483

루터: 출생

 

1484

츠빙글리: 출생

 

1492

콜럼버스 신대륙을 발견

조선 연산군 즉위

1494

 

 

1495

보름스 국회 개회

 

1499

스위스 독립

1504년 갑자사화 일어남

1500

카브랄이 브라질 발견

 

1503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다

중종반정으로 조선 연산군 폐위, 중종즉위

1506

츠빙글리: 로마카톨리교회 사제서품

 

1509

요한칼빈탄생

 

1516

스위스종교개혁시작

 

1517

루터: 95개논제 공표

기묘사화 일어남

1519

라이프치히의 토론. 루터와 에크의 논쟁 벌어짐

 

1520

루터: 파문당함

신사무옥 일어남

1521

루터: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함

 

1521

루터: 독일 보름스국회, 루터 추방

 

1525

루터: 카트리나 폰보라와 결혼

 

1527

재세례파의 첫순교자 펠리스만츠 순교

 

1527

영국왕 헨리 8세 이혼문제로 로마교황과 대립.

 

1531

츠빙글리: 카펠전투에서 전사

 

1536

칼빈: 기독교강요 라틴어초판

 

1538

칼빈: 제네바에서 추방당함

 

1541

칼빈: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킴

조선 명종 즉위

1545

트랜트 종교회의

을사사화 일어남

1545

 

 

1546

루터: 사망

정미약조

1547

 

1550년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 사액

1550

 

을묘왜변이 일어남

1555

 

 

1559

칼빈: 기독교강요 결정판

 

1564

칼빈: 사망

 

1564

미켈란젤로 사망. 셰익스피어 탄생

조선 선조 즉위

1567

 

기축옥사(정여립의 난)가 일어남

1589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 패하다

임진왜란발발

1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