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영의... 핀란드편
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여행기)
보통 스칸디나비아를 말할 때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를 말한다. 그러나 핀랜드를 포함 시키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이번에 위 4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유명지역을 돌아보고 왔다. 따라서 이번 여행기는 1) 핀란드의 헬싱키 편 2) 스웨덴의 스톡홀름 편 3) 노르웨의 편 4) 덴마킁의 코펜 하겐 편 등의 순으로 여행기를 연재 하고자 한다.
1) 핀랜드, 헬싱키편
2011년6월25일, 기다리던 북유럽 여행일이 다가왔다.
서울 출장에서 돌아와 다시 긴여행을 떠나기엔 건강상 좀 무리란 생각이 들었지만아직은 젊다(?)는 기분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주위에서 크고 작은 각종 6.25 참전 기념 행사가 있는 시기에다 총연이 선거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전직회장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이 마음의 부담을 느낀다.
이날 오후 5시경 하나 여행사가 제공한 차량편으로 필라 공항에 도착, 런던까지3,546마일을 그리고 런던에서 헬싱키 까지 1,152마일을 날아가기 위하여 예약된 항공기(British Airway)를 탑승했다. 예정시간보다 20여분 늦은 밤 9시 50분경 항공기는 필라 활주로를 박차고 어두움을 가르며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 올랐다. 스칸디나 비아 3국이란 원칙적으로 헬싱키를 제외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등 3국을 말하지만 네나라가 서로 인접해 있고 같은 문화권과 생활 환경이 비슷한 부유한 나라들이다. 어쨋든 4개국을 11일간 일정으로 돌아 본다는 것은 너무 짧은 생각이 들지만, 평소 왕래가 드문 한동네 사람들과 11일간 함께 어울려 바쁘게 움직여야하는 여행은 또 다른 인간관계 설정으로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일행들은 기내의 식사를 마친후 피로가 몰려 오는지 잠을 청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필자는 노트북을 꺼내 들고 11일간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행기 서문을 쓰기시작한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Helsinki)
드디어 런던을 거쳐 핀란드의 헬싱키까지10시간의 비행끝에 현지 시간 6월26일 17.00시에 헬싱키에 도착 했다. 필라를 기준으로 시차가 5시간인 런던국제공항에서 부터 2시간의 시차가 더있으니 필라에서 핀란드 헬신키 까지는 7시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이곳을 안내할 황씨라는 남자 분이 우리를 기다렸다. 32년전 이 나라에 태권도사범으로 와서 시민권을 획득하여 살고 있다는 안내는 현직 한인 회장으로 현지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던 현지 동포로서 필자와 동갑 내기였다.
헬싱키 공항
핀란드는 바다로 둘러 싸인 발틱해안 국가이다. 이나라의 수도 헬싱키는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문화적 유물이 많은곳이다.
이 도시의 인구는 560,000로, 도시의 면적은 187.1Km2, 헬싱키 국토는 남북한 크기의 한배 반정도로서 경제는 펄프 및 로키아 (IT)산업 그리고 관광수입등으로 GNP가 $45,000에 달하는 부유한 국가로 복지 교육제도가 잘되어 있다. 이나라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속하는 인접 국가와 마찬가지로산림, 호수가 많으며 밤 11시까지 밖이 밝은 백야현상을 볼 수 있다. 이나라는 현재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모두 여성으로 지구상에서 여성상위 시대를실현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60여개의 박물관, 세계적인 건축물과 디자인으로 유명한 나라이기도 하며, 18세기에 구축된 소멜린아 요세는 이민족의 자존심을 지킨곳으로 유명하다. 18만개의호수가 있고 6월의 기온이 필라델피아와 같은 느낌이나 겨울엔 영하 35-45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나라라 했다. 한인은 약 300명정도 살고 있으며 주로 국제결혼하신분, 회사주재원, 학생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나라는 한때 스웨덴으로 부터 침략을 받아 600년간 식민 통치하에 있었고, 그후 러시아로 부터 침략을 받고 겨울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으나 여름전쟁때 패함으로서 식민지가 되었다가 1917년 독립을 하면서 국토의 12% 를러시아에게 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나라이기도 하다. 이나라의 국기는흰바탕 중앙에 청색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는 루턴교를 상징하며 청색은 물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녁을 현지식으로 하고 호텔로 들어가 헬싱키에서 첫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내일아침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편의상 필요한 용품만 꺼내놓고 가방을 그대로 싸둔체 하루밤을 보내기로 했다. 저녁식후 호텔주위를 걸었다. 거리는 한가하고 깨끗한편으로 특이한 것은 거리에 교통 신호등을 볼 수 없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변두리 거리에서 신호등을 볼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이집트는 교통이 혼잡하고 매연으로 인한 공해가 심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거리엔 교통신호등 대신 누가 먼저 차머리를 앞으로 들이 대는자가 임자 였던것으로 기억되나 이곳은 교통량이 한가하여누가 먼저 교차로에 도착했느냐에 따라 여유있게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내일 아침 부터 9일간의 본격적인 관광이 시작된다. 이곳에 도착하기 까지 오랜 비행의의 여독과 시차로 인한 긴장 때문인지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밤새 비몽사몽 상태에서 새벽 5시경잠자리에서 일어나 호텔주위를 가볍게 산책한후 아침식사를 마쳤다.
헬싱키, 마켓 (Market) 광장
아침 9시경에 호텔을 출발하여 옛날 헬신키가 스웨덴, 러시아로부터 침공받았을때 이곳을 요새화 하여 이도시를 지켜 냈다는 소멜린아(Soumelinna) 섬으로 이동하기 로 했다. 이 요세는 이민족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날씨는 대부분 구름으로 하늘이 가리워져 있었고 이따금씩 밝은햇빛이 구름을 비집고 나와 대지를 비치고 있었다. 그런대로 구름 사이사이로 얼굴을 비치던 햇님이 오후가 되자 기여코 보슬비를 뿌리기 시작했다.아침 출발전에 우산을 준비하라는 안내의 말대로 준비한 우산을 아내가 폈으나 필자는 이국에서 가랑비를 맞으며 걸어 보는 것도 정취가 있을 것 같아 보슬비를 맞으며 걸었다. 도로는 아스팔드로 포장된 부분도 있고 일부는돌조각으로 포장되어 전통 유럽풍을 자랑하는 유럽의 고전 도시를 연상케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아직도 전철선로가 도로위에 검은 뱀처럼 길게뻗어 있다는것이다. 안내는 이런 상황을 고풍을 보전하기 위한 국가 정책의일환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필자는 이에 선듯 동의 할수 없었다.
선착가로 가는 도중 일반 공동 묘지를 지나치게 되였는데, 특이한 것은 이곳에 고인이 된 대통령들도 함께 영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나라에서는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논리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소멜린아 섬으로 가기위해 집결한 선착장은 시청과 대통령궁이 있는 곳이며, 그 궁앞에 넓은 Market광장위에 전통 재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헬싱키, 마켓관장과 전통시장
우리가 선착장에서 인원을 점검한결과 일행중 한가족을 호텔에다 두고온 것을 알게 되었다. 첫날 부터 낙오자가 발생한 셈이다. 낙오의 원인은 호텔 줄발전에 철저한 인원 점검이 이루어 지지않은 불찰도 있었지만 미리 약속된 출발 예정 시간보다 5분빠르게 호텔을 출발한 이유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누락된 인원이 택시로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주위 마켓시장을 돌아 보는 시간을연장하기로 했다. 이나라 대통령이 직접 민심을 살펴 선정을 베풀기 위해 이 전통시장에 가끔들려 핫도그를 사먹는다는 이광장이 바로 대통령 집무실 앞에 자리 잡고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것 같다. 이 곳에는 이나라의 각종 토속적인 선물은 물론 각양각색의 신선한 과일과생선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화초 그리고 각종 농산품등을 볼수 있었으며,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도록 토속적인 음식물도 만들어 팔고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마련한 의자에 앉아 그들의 음식을 맛보고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의아하게 생각 하는 것은 지구상에 대통령 궁에 울타리는커녕 경비병도 없이 완전히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 있는 나라도 있다는 것이다. 국민과 자연 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형성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마치 범죄가 없는 지상 천국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낙오된 일행이 도착했다. 미안해 하는 낙오자(?)를 먼저 출발해서 일어난 사건이라 위로 하면서 우리는 요새지대로 가기위해 대기하고 있는작은 Ferry에 올랐다. Ferry가 광장 부두 를 떠나 잔잔한 바다를 헤쳐 가는동안 군데 군데 수면위로 작은 파란 봉우리 섬들이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이런 모형의 작은 섬들이 인근에 300개나 있다는 것이다.
소멜린아 섬으로 가는 도중 작은 섬
광장부두를 떠난 Ferry는15분간의 운항끝 에Suomenlinna(Sveaborg)의 섬에도착했다.
헬싱키, 소멜린아 섬(Soumelinna)으로 배 에서 내려 안내를 따라 섬안으로 들어 서자 입구와 그리 멀지 않은 왼쪽언덕위로 높다랗게 무성한 나무가지에 밑이 가려있는 하얀 석조 건물의 교회가 있었다. 18세기 당시 건축되었다는 이교회는 이섬이 전술 기지로서의역사와 함께 이섬을 지켜온 교회로 전쟁당시에는 교회로서역활보다 등대역활을 했다는 역사적인 유물이다.(사)
소멜린아 섬의 교회
소멜린아섬을 사수한 장군의 묘비
교회를 지나자 한쪽에 돌로 만든 기념 비석과 그위에 장군의 투구를 전시해 놓았는데 이섬을 요세화 하여 이나라를 외세로부터 방어한 장군의 것이라 한다.
안쪽으로 좀더 깊숙이 발길을 돌리니 주위엔 온통 벽돌과 자연석을 쌓아 올린성벽과 제법 많은 군사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긴턴넬로 구축된 방공호가이색적이 었다.
방공호에 들어가보니 냉동 시설같이 시원했다. 콩크릿트 방어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적의 예상 접근로를 향해 각종 화기를 설치할 수 있는 화구들이 보였다.(사)
소멜린아섬의 딸굴 방공호
게다가 이 섬은 바다로 둘러 쌓여 있어 외부로 부터 침공을 막기 유리한 요새로서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섬주위 는 해안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중장비인 대형 대포들이 배치 되어 있었다. 바다를 통해 기습해 오는 적을 섬멸하기에 필요한 화기 였으리라.
소멜린아섬 예상 접근로를 향해 설치한 대포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바다의 지형지물과 파도의 조류를 전략적으로활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이들도 천애의 요새를 최대한 활용하여외적을 물리쳤다는공통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이섬은 유네스코에서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 년간 700,000명의 외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있다고 한다.
도보로 섬을 한바퀴 도는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소요 되었다. 섬을 보고 나서 시원한 나무 그늘에 둘러 앉아 일행들이 정식 상견례를 가졌다.
잠간의 휴식과 자기 소개 시간
앞으로 10여일간 함께 생활할사람들의 인적 사항은 알아야 분위기가 좋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 직업 가족등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형식으로 약식 상견례를 마치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우리는 타고온 Ferry를 다시 타고 섬에서 나올때는 이미 점심 때가 되었다. “Jinnegela”라는 현지 식당에서 오찬을 하고 “원로 광장”으로 이동 했다.
헬싱키, 원로원 광장
원로 광장의 바닥은 40만개이상의 화강암을 사용 3000평방 미터의 정방형 크기로 구축되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드넓은 광장엔 이미 관광객으로붐비고 있었다. 이 곳은 국가 차원의 봄가을 축제 행사, 상품전시회, 예술제등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원로원 광장 과 대성당(러시아의 알랙산더 대왕 동상)
광장주위에는 대성당, 국립도서관, 종합청사 건물들이 있었는데 이건축물들은 대개 1820-1840사이에 지어진 핀란드 건축 양식이다. 우측에37개의 계단을 쌓아 올린 지형위에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는 대성당은 1830-1851년에 황제 니콜라이 1세 명에 의해 독일의 엔겔이라는 설계사에 의해녹색돔의 지붕과 하얀 대리석으로 네오크라식의 건축 양식으로 웅장하게 건축된 건물이다. 처음엔 이성당의 이름을 성당을 건축케한 황제의 이름을 따 “니콜라이 교회”로 명명 하였으나 1959년 “대성당”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한다.
광장 중앙엔 1863년도경 이나라를 지배하던 러시아의 알랙산드로 2세 대왕의 동상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록 이나라를 정복했던 적국의황제 였지만 그가 이나라를 통치할때 이나라 언어를 사용하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던 것을 감안하고, 이나라 후세들에게 더이상 뼈아픈 과거사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교육자료로 원형 그대로 남겨 놓았다는데 우리 민족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듯했다.(사)
헬싱키, 암반 교회를 찾아서
원로 광장을 둘러 보고 기념 사진을 찍은 다음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건축했다는 암반 교회로 이동했다. 암반 교회(암석 교회)로 가는 길엔 헬싱키에서 가장번화가라는 맨나하임거리를 지나게 된다.
헬싱키의 번화가 맨나하임 거리
이거리는 1939년 겨울 러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맨나하임장군의 이름을 따서 만든 거리 이름 이란다. 우리가 교회에 도착하니 이곳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교회에 있었다.
암반교회는거대한 바위산을 폭파해서 초록색 원형지붕을 씨운 개신 루터 교회이다. 교회 입구는 대공 미사일 공격을 방어 하기 위한 천연 요새입구같이 콩크릿트로 견고 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이 교회는 1969년 티모스 오모라이넨 과 트르모스 오모라아넨 형제가 설계하여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교회안을 들어 서니 거대한 바위의 품속같은 넓은 공간에300명이상 신도가 앉아 예배 볼수 있도록 예배석이 마련 되어 있었다.(사)
헬싱키,암석교회 내부
헬싱키, 암석교회 내부 파이프 올간
교회내부 앞 천정에는 지붕으로 부터 투과 되는 햇빛을 받아 실내를 밝게 하도록 광채나는 특수 시설을 하여 안을 밝게 하고 동시에 미적감각을 내고있었고, 좌측벽엔 특수 설계된 웅장한 황금색 파이프 올갠이 4부분으로 나뉘어져 웅장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그밑에 작은 전자 올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경건의 찬양이 울려 퍼질것 같은 분위기이다. 마침 우리가도착한 시간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트럼벧과 트럼본 연주 합창단이 한창연습중이었다. 관광객들이 여기 저기 자리하고 조용히 이들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필자부부도 그들과 석여 앉아 그들의 연주를 잠시 감상할수있었으나 다음 장소로 옮기기위하여 곧 자리를 떠야 했다. 이번에는 핀란드의 국민 음악가 시벨리우스를 기념한 시벨리우스 공원을 가기 위해서다.
헬싱키, 국민 음악가 시벨리우스의 공원
공원에 도착하니 납색의 거대한 야외 파이프 올간과 그바로 옆에 자연 바위 덩이위에 역시 납색으로 조각되어 설치되어진 이나라의 유명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고원의 조각품들은 여성 조각가에일라 힐토넨이 50여명의 응시한 경쟁에서 당당히 입선한 작품으로 설계 한 것이란다.
헬싱키, 국민 음악가 시벨리우스의 공원
올간 파이프를 올려다 보니 수백년의 추위속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얼면서 형성된 길고 짧은 그리고 굵고 가는 고드름들이 한데 엉겨 미적 조화를나타내고 있는 형상이라 할가---? 올간 파이프 모형을 작가가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 시켜 놓은 것이다. 365개의 납색 파이프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땅을 향해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웅장한 심포니가 울려 퍼질것 같았다. 파이프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성한 파이프는 하나도 없었다.파이프 마다 깨진 종을 연상하듯 홈이 패여있고 울퉁불퉁 상처처럼 특색있는 구멍 흔적이 보였는데 이것은 물방울과 고드름의 조화를 상징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했다.
게다가 파이프 숫자가 365개로 만든 것은 1년 365일 내내 음악이 울려 퍼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바로 그 파이프 올간 구조물 옆 바윗돌위에 올려져 있는 작곡가 시벨리우스 의 대형 얼굴 조형물은 근엄 하면서도 마치 세상고민을 홀로 얼굴에 담고 있는 듯하게 보였다.
헬싱키, 국민작곡가 시벨리우스 얼굴
아마도 대곡일수록 작곡가의 깊은 고뇌속에서 창작되어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이렇게 바위에서 침묵하고 있는 시벨리우스는 필랜드국민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없이 존경받는 작곡가라 한다.
시벨리우스는 원래 헤멜리나에서 태어난 법대출신의 법학도 였다. 그러나그는 작곡에 취미 가 있어 취미생활로 작곡활동하던것이 작곡가로 변신한사람으로 500여곡의 심포니 교향곡을 작곡했다는데 이곡을 모두 필란드 심포니에서 연주할정도로 작곡가로 대성한 사람이다. 모두들 공원에서 좀더여유를 부리고 싶었으나 다음 스케줄인 스웨덴으로 가는 쿠르스 출발시간이 가까와 졌기 때문에 서두르라는 안내의 말에 일행들의 카메라작동이 분주 해 졌다.
헬싱키 부두에 도착하자 “그렇게 아시면 되겠습니다” 라는 말끝으로 우리들의 질문을 적당히 얼버므리던---, 그러나 열심히 2일간 수고하신 안내(황회장)는 우리들의 출국 수속을 도와주는 것을 끝으로 선착장에서 작별해야 했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며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우리 일행은스웨덴으로 가는 쿠르스 “Silja Line”호에 올랐다.
다음은 스웨덴편 계속
보통 스칸디나비아를 말할 때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를 말한다. 그러나 핀랜드를 포함 시키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이번에 위 4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유명지역을 돌아보고 왔다. 따라서 이번 여행기는 1) 핀란드의 헬싱키 편 2) 스웨덴의 스톡홀름 편 3) 노르웨의 편 4) 덴마킁의 코펜 하겐 편 등의 순으로 여행기를 연재 하고자 한다.
1) 핀랜드, 헬싱키편
2011년6월25일, 기다리던 북유럽 여행일이 다가왔다.
서울 출장에서 돌아와 다시 긴여행을 떠나기엔 건강상 좀 무리란 생각이 들었지만아직은 젊다(?)는 기분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주위에서 크고 작은 각종 6.25 참전 기념 행사가 있는 시기에다 총연이 선거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전직회장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이 마음의 부담을 느낀다.
이날 오후 5시경 하나 여행사가 제공한 차량편으로 필라 공항에 도착, 런던까지3,546마일을 그리고 런던에서 헬싱키 까지 1,152마일을 날아가기 위하여 예약된 항공기(British Airway)를 탑승했다. 예정시간보다 20여분 늦은 밤 9시 50분경 항공기는 필라 활주로를 박차고 어두움을 가르며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 올랐다. 스칸디나 비아 3국이란 원칙적으로 헬싱키를 제외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등 3국을 말하지만 네나라가 서로 인접해 있고 같은 문화권과 생활 환경이 비슷한 부유한 나라들이다. 어쨋든 4개국을 11일간 일정으로 돌아 본다는 것은 너무 짧은 생각이 들지만, 평소 왕래가 드문 한동네 사람들과 11일간 함께 어울려 바쁘게 움직여야하는 여행은 또 다른 인간관계 설정으로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일행들은 기내의 식사를 마친후 피로가 몰려 오는지 잠을 청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필자는 노트북을 꺼내 들고 11일간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행기 서문을 쓰기시작한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Helsinki)
드디어 런던을 거쳐 핀란드의 헬싱키까지10시간의 비행끝에 현지 시간 6월26일 17.00시에 헬싱키에 도착 했다. 필라를 기준으로 시차가 5시간인 런던국제공항에서 부터 2시간의 시차가 더있으니 필라에서 핀란드 헬신키 까지는 7시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이곳을 안내할 황씨라는 남자 분이 우리를 기다렸다. 32년전 이 나라에 태권도사범으로 와서 시민권을 획득하여 살고 있다는 안내는 현직 한인 회장으로 현지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던 현지 동포로서 필자와 동갑 내기였다.
헬싱키 공항
핀란드는 바다로 둘러 싸인 발틱해안 국가이다. 이나라의 수도 헬싱키는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문화적 유물이 많은곳이다.
이 도시의 인구는 560,000로, 도시의 면적은 187.1Km2, 헬싱키 국토는 남북한 크기의 한배 반정도로서 경제는 펄프 및 로키아 (IT)산업 그리고 관광수입등으로 GNP가 $45,000에 달하는 부유한 국가로 복지 교육제도가 잘되어 있다. 이나라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속하는 인접 국가와 마찬가지로산림, 호수가 많으며 밤 11시까지 밖이 밝은 백야현상을 볼 수 있다. 이나라는 현재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모두 여성으로 지구상에서 여성상위 시대를실현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60여개의 박물관, 세계적인 건축물과 디자인으로 유명한 나라이기도 하며, 18세기에 구축된 소멜린아 요세는 이민족의 자존심을 지킨곳으로 유명하다. 18만개의호수가 있고 6월의 기온이 필라델피아와 같은 느낌이나 겨울엔 영하 35-45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나라라 했다. 한인은 약 300명정도 살고 있으며 주로 국제결혼하신분, 회사주재원, 학생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나라는 한때 스웨덴으로 부터 침략을 받아 600년간 식민 통치하에 있었고, 그후 러시아로 부터 침략을 받고 겨울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으나 여름전쟁때 패함으로서 식민지가 되었다가 1917년 독립을 하면서 국토의 12% 를러시아에게 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나라이기도 하다. 이나라의 국기는흰바탕 중앙에 청색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는 루턴교를 상징하며 청색은 물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녁을 현지식으로 하고 호텔로 들어가 헬싱키에서 첫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내일아침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편의상 필요한 용품만 꺼내놓고 가방을 그대로 싸둔체 하루밤을 보내기로 했다. 저녁식후 호텔주위를 걸었다. 거리는 한가하고 깨끗한편으로 특이한 것은 거리에 교통 신호등을 볼 수 없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변두리 거리에서 신호등을 볼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이집트는 교통이 혼잡하고 매연으로 인한 공해가 심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거리엔 교통신호등 대신 누가 먼저 차머리를 앞으로 들이 대는자가 임자 였던것으로 기억되나 이곳은 교통량이 한가하여누가 먼저 교차로에 도착했느냐에 따라 여유있게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내일 아침 부터 9일간의 본격적인 관광이 시작된다. 이곳에 도착하기 까지 오랜 비행의의 여독과 시차로 인한 긴장 때문인지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밤새 비몽사몽 상태에서 새벽 5시경잠자리에서 일어나 호텔주위를 가볍게 산책한후 아침식사를 마쳤다.
헬싱키, 마켓 (Market) 광장
아침 9시경에 호텔을 출발하여 옛날 헬신키가 스웨덴, 러시아로부터 침공받았을때 이곳을 요새화 하여 이도시를 지켜 냈다는 소멜린아(Soumelinna) 섬으로 이동하기 로 했다. 이 요세는 이민족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날씨는 대부분 구름으로 하늘이 가리워져 있었고 이따금씩 밝은햇빛이 구름을 비집고 나와 대지를 비치고 있었다. 그런대로 구름 사이사이로 얼굴을 비치던 햇님이 오후가 되자 기여코 보슬비를 뿌리기 시작했다.아침 출발전에 우산을 준비하라는 안내의 말대로 준비한 우산을 아내가 폈으나 필자는 이국에서 가랑비를 맞으며 걸어 보는 것도 정취가 있을 것 같아 보슬비를 맞으며 걸었다. 도로는 아스팔드로 포장된 부분도 있고 일부는돌조각으로 포장되어 전통 유럽풍을 자랑하는 유럽의 고전 도시를 연상케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아직도 전철선로가 도로위에 검은 뱀처럼 길게뻗어 있다는것이다. 안내는 이런 상황을 고풍을 보전하기 위한 국가 정책의일환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필자는 이에 선듯 동의 할수 없었다.
선착가로 가는 도중 일반 공동 묘지를 지나치게 되였는데, 특이한 것은 이곳에 고인이 된 대통령들도 함께 영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나라에서는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논리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소멜린아 섬으로 가기위해 집결한 선착장은 시청과 대통령궁이 있는 곳이며, 그 궁앞에 넓은 Market광장위에 전통 재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헬싱키, 마켓관장과 전통시장
우리가 선착장에서 인원을 점검한결과 일행중 한가족을 호텔에다 두고온 것을 알게 되었다. 첫날 부터 낙오자가 발생한 셈이다. 낙오의 원인은 호텔 줄발전에 철저한 인원 점검이 이루어 지지않은 불찰도 있었지만 미리 약속된 출발 예정 시간보다 5분빠르게 호텔을 출발한 이유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누락된 인원이 택시로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주위 마켓시장을 돌아 보는 시간을연장하기로 했다. 이나라 대통령이 직접 민심을 살펴 선정을 베풀기 위해 이 전통시장에 가끔들려 핫도그를 사먹는다는 이광장이 바로 대통령 집무실 앞에 자리 잡고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것 같다. 이 곳에는 이나라의 각종 토속적인 선물은 물론 각양각색의 신선한 과일과생선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화초 그리고 각종 농산품등을 볼수 있었으며,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도록 토속적인 음식물도 만들어 팔고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마련한 의자에 앉아 그들의 음식을 맛보고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의아하게 생각 하는 것은 지구상에 대통령 궁에 울타리는커녕 경비병도 없이 완전히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 있는 나라도 있다는 것이다. 국민과 자연 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형성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마치 범죄가 없는 지상 천국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낙오된 일행이 도착했다. 미안해 하는 낙오자(?)를 먼저 출발해서 일어난 사건이라 위로 하면서 우리는 요새지대로 가기위해 대기하고 있는작은 Ferry에 올랐다. Ferry가 광장 부두 를 떠나 잔잔한 바다를 헤쳐 가는동안 군데 군데 수면위로 작은 파란 봉우리 섬들이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이런 모형의 작은 섬들이 인근에 300개나 있다는 것이다.
소멜린아 섬으로 가는 도중 작은 섬
광장부두를 떠난 Ferry는15분간의 운항끝 에Suomenlinna(Sveaborg)의 섬에도착했다.
헬싱키, 소멜린아 섬(Soumelinna)으로 배 에서 내려 안내를 따라 섬안으로 들어 서자 입구와 그리 멀지 않은 왼쪽언덕위로 높다랗게 무성한 나무가지에 밑이 가려있는 하얀 석조 건물의 교회가 있었다. 18세기 당시 건축되었다는 이교회는 이섬이 전술 기지로서의역사와 함께 이섬을 지켜온 교회로 전쟁당시에는 교회로서역활보다 등대역활을 했다는 역사적인 유물이다.(사)
소멜린아섬을 사수한 장군의 묘비
교회를 지나자 한쪽에 돌로 만든 기념 비석과 그위에 장군의 투구를 전시해 놓았는데 이섬을 요세화 하여 이나라를 외세로부터 방어한 장군의 것이라 한다.
안쪽으로 좀더 깊숙이 발길을 돌리니 주위엔 온통 벽돌과 자연석을 쌓아 올린성벽과 제법 많은 군사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긴턴넬로 구축된 방공호가이색적이 었다.
방공호에 들어가보니 냉동 시설같이 시원했다. 콩크릿트 방어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적의 예상 접근로를 향해 각종 화기를 설치할 수 있는 화구들이 보였다.(사)
소멜린아섬의 딸굴 방공호
게다가 이 섬은 바다로 둘러 쌓여 있어 외부로 부터 침공을 막기 유리한 요새로서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섬주위 는 해안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중장비인 대형 대포들이 배치 되어 있었다. 바다를 통해 기습해 오는 적을 섬멸하기에 필요한 화기 였으리라.
소멜린아섬 예상 접근로를 향해 설치한 대포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바다의 지형지물과 파도의 조류를 전략적으로활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이들도 천애의 요새를 최대한 활용하여외적을 물리쳤다는공통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이섬은 유네스코에서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 년간 700,000명의 외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있다고 한다.
도보로 섬을 한바퀴 도는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소요 되었다. 섬을 보고 나서 시원한 나무 그늘에 둘러 앉아 일행들이 정식 상견례를 가졌다.
잠간의 휴식과 자기 소개 시간
앞으로 10여일간 함께 생활할사람들의 인적 사항은 알아야 분위기가 좋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 직업 가족등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형식으로 약식 상견례를 마치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우리는 타고온 Ferry를 다시 타고 섬에서 나올때는 이미 점심 때가 되었다. “Jinnegela”라는 현지 식당에서 오찬을 하고 “원로 광장”으로 이동 했다.
헬싱키, 원로원 광장
원로 광장의 바닥은 40만개이상의 화강암을 사용 3000평방 미터의 정방형 크기로 구축되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드넓은 광장엔 이미 관광객으로붐비고 있었다. 이 곳은 국가 차원의 봄가을 축제 행사, 상품전시회, 예술제등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원로원 광장 과 대성당(러시아의 알랙산더 대왕 동상)
광장주위에는 대성당, 국립도서관, 종합청사 건물들이 있었는데 이건축물들은 대개 1820-1840사이에 지어진 핀란드 건축 양식이다. 우측에37개의 계단을 쌓아 올린 지형위에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는 대성당은 1830-1851년에 황제 니콜라이 1세 명에 의해 독일의 엔겔이라는 설계사에 의해녹색돔의 지붕과 하얀 대리석으로 네오크라식의 건축 양식으로 웅장하게 건축된 건물이다. 처음엔 이성당의 이름을 성당을 건축케한 황제의 이름을 따 “니콜라이 교회”로 명명 하였으나 1959년 “대성당”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한다.
광장 중앙엔 1863년도경 이나라를 지배하던 러시아의 알랙산드로 2세 대왕의 동상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록 이나라를 정복했던 적국의황제 였지만 그가 이나라를 통치할때 이나라 언어를 사용하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던 것을 감안하고, 이나라 후세들에게 더이상 뼈아픈 과거사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교육자료로 원형 그대로 남겨 놓았다는데 우리 민족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듯했다.(사)
헬싱키, 암반 교회를 찾아서
원로 광장을 둘러 보고 기념 사진을 찍은 다음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건축했다는 암반 교회로 이동했다. 암반 교회(암석 교회)로 가는 길엔 헬싱키에서 가장번화가라는 맨나하임거리를 지나게 된다.
헬싱키의 번화가 맨나하임 거리
이거리는 1939년 겨울 러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맨나하임장군의 이름을 따서 만든 거리 이름 이란다. 우리가 교회에 도착하니 이곳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교회에 있었다.
암반교회는거대한 바위산을 폭파해서 초록색 원형지붕을 씨운 개신 루터 교회이다. 교회 입구는 대공 미사일 공격을 방어 하기 위한 천연 요새입구같이 콩크릿트로 견고 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이 교회는 1969년 티모스 오모라이넨 과 트르모스 오모라아넨 형제가 설계하여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교회안을 들어 서니 거대한 바위의 품속같은 넓은 공간에300명이상 신도가 앉아 예배 볼수 있도록 예배석이 마련 되어 있었다.(사)
헬싱키,암석교회 내부
헬싱키, 암석교회 내부 파이프 올간
교회내부 앞 천정에는 지붕으로 부터 투과 되는 햇빛을 받아 실내를 밝게 하도록 광채나는 특수 시설을 하여 안을 밝게 하고 동시에 미적감각을 내고있었고, 좌측벽엔 특수 설계된 웅장한 황금색 파이프 올갠이 4부분으로 나뉘어져 웅장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그밑에 작은 전자 올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경건의 찬양이 울려 퍼질것 같은 분위기이다. 마침 우리가도착한 시간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트럼벧과 트럼본 연주 합창단이 한창연습중이었다. 관광객들이 여기 저기 자리하고 조용히 이들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필자부부도 그들과 석여 앉아 그들의 연주를 잠시 감상할수있었으나 다음 장소로 옮기기위하여 곧 자리를 떠야 했다. 이번에는 핀란드의 국민 음악가 시벨리우스를 기념한 시벨리우스 공원을 가기 위해서다.
헬싱키, 국민 음악가 시벨리우스의 공원
공원에 도착하니 납색의 거대한 야외 파이프 올간과 그바로 옆에 자연 바위 덩이위에 역시 납색으로 조각되어 설치되어진 이나라의 유명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고원의 조각품들은 여성 조각가에일라 힐토넨이 50여명의 응시한 경쟁에서 당당히 입선한 작품으로 설계 한 것이란다.
헬싱키, 국민 음악가 시벨리우스의 공원
올간 파이프를 올려다 보니 수백년의 추위속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얼면서 형성된 길고 짧은 그리고 굵고 가는 고드름들이 한데 엉겨 미적 조화를나타내고 있는 형상이라 할가---? 올간 파이프 모형을 작가가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 시켜 놓은 것이다. 365개의 납색 파이프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땅을 향해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웅장한 심포니가 울려 퍼질것 같았다. 파이프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성한 파이프는 하나도 없었다.파이프 마다 깨진 종을 연상하듯 홈이 패여있고 울퉁불퉁 상처처럼 특색있는 구멍 흔적이 보였는데 이것은 물방울과 고드름의 조화를 상징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했다.
게다가 파이프 숫자가 365개로 만든 것은 1년 365일 내내 음악이 울려 퍼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바로 그 파이프 올간 구조물 옆 바윗돌위에 올려져 있는 작곡가 시벨리우스 의 대형 얼굴 조형물은 근엄 하면서도 마치 세상고민을 홀로 얼굴에 담고 있는 듯하게 보였다.
헬싱키, 국민작곡가 시벨리우스 얼굴
아마도 대곡일수록 작곡가의 깊은 고뇌속에서 창작되어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이렇게 바위에서 침묵하고 있는 시벨리우스는 필랜드국민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없이 존경받는 작곡가라 한다.
시벨리우스는 원래 헤멜리나에서 태어난 법대출신의 법학도 였다. 그러나그는 작곡에 취미 가 있어 취미생활로 작곡활동하던것이 작곡가로 변신한사람으로 500여곡의 심포니 교향곡을 작곡했다는데 이곡을 모두 필란드 심포니에서 연주할정도로 작곡가로 대성한 사람이다. 모두들 공원에서 좀더여유를 부리고 싶었으나 다음 스케줄인 스웨덴으로 가는 쿠르스 출발시간이 가까와 졌기 때문에 서두르라는 안내의 말에 일행들의 카메라작동이 분주 해 졌다.
헬싱키 부두에 도착하자 “그렇게 아시면 되겠습니다” 라는 말끝으로 우리들의 질문을 적당히 얼버므리던---, 그러나 열심히 2일간 수고하신 안내(황회장)는 우리들의 출국 수속을 도와주는 것을 끝으로 선착장에서 작별해야 했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며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우리 일행은스웨덴으로 가는 쿠르스 “Silja Line”호에 올랐다.
다음은 스웨덴편 계속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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