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영의... 덴마크편


이오영,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덴마크(Denmark)  편
 
Denmark 수도코펜하겐(Copenhagen) 향하여
 
노르웨이 Bergen 공항에서 덴마크로 가기위해 첵크인이 끝나자 지금까지 안내하던Miss.정이 "앞으론 더이상 여행 가이드를 하지 않게 될것이다"라며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32세 아직도 미혼이라는 꽤나 도전적이고 영리한 그녀는 “왜 나같은 사람을 데려가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익살을 떨기도 했었다.  일행중 중매서겠다는 제의에 “그런말은 100번도 더들었다”고 자연스럽게 받아 넘기는 안내양이다.
한번도 지켜준적이 없는 관광객의 허풍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녀가 좋은 남자 만나 속히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좋은 소식 있었으면 좋겠네” 진심어린 인사를 남기고 안내와 헤여젔다.
 
우리가 노르웨이 공항을 떠나 2시간 비행끝에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오후 9.30분이었다. 미동부 시간과는 6시간의 시차가 그대로 상존 한다.
공항을 나오니 후끈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나 여름 치고는 그런대로 선선한 편이었다.
기온이 섭씨 23도라 했다.
공항에는 현지인과 결혼 하여 20년째 살고 있다는 경륜있어 보이는 여성 안내(김정선)가 우리를 맞았다. 그녀는 우리를 대기 하고 있는 버스로 안내하며 오늘저녁 머물호텔로 안내 하겠다고 한다.
버스가 출발하자 “덴마크 코펜하겐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그 나라에 대해 마치 원고를 읽듯 유창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버스안에 운전기사가 준비해 놓은 물이 한병에 2불이란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공항을 출발한 버스는 얼마 가지 못해 교통 체증에 걸려 도로위에서 완전히 정체되어 버렸다.
 

 

덴마크 시가지 (교통체증)
 
어제 이지역에 집중 폭우로 인해 도로까지 파괴되는 엄청난 수해가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덴마크는4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4,390Km2의 국토에 국가 인구 540만명중 100만이 코펜하겐에 살고 있다고 한다. GNP는 $58,000이고 어업과 농업을 중시 여기고있다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4%에 해당할 뿐이다. 주중 일하는 시간은 평균37시간, 6주의 휴가가 허용되는 나라이다.
한인이 250명정도이고, 입양아가 8,000명정도라한다.
이곳에는 정한 협회라는 한인 입양아와 입양 부모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모임이활발하게 활동 하고 있다고 했다. 시회보장제도는 잘되어 있는 편이며 교육도 대학까지 무료란다.
가난한 시절 대학 등록금때문에 가정교사등으로 전전 긍긍하던 생각을 하면 이런 환경속에서 공부 하는 대학생들이 부럽기만 하다.
세금은 높은 편이어서 38-62%까지 수입의 정도에 따라 부과된다고 하며, 이나라는산 대신 넓은 평야가 많은편이며 가장높은 산은 해발 173m라고 한다. 백야현상으로밤 11시에 어두어지고 새벽 3시면 밝아지는 곳이란다.
 
원래 코펜은 상인이란 뜻이며, 하겐은 운하라는 뜻이다.
이 도시이름이 말해 주듯 이도시는 운하를 중심으로 상업이 활발한 도시이다.
이나라는 바다로 둘러 쌓여 750-1050년 경 바다를 중심으로 무역을 주름 잡던 “바이킹”의 본 고장이기도 하고, 현재 청어와 연어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인지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대를 다니는 동안 연어 훈제가 식탁마다 올라와서이번 여행을 통하여 연어는 원없이 먹어본 셈이다.
 
덴마크는 1800년대에 이르러 문화의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1900년도에 중립을 표방했으나 1940-45년 독일의 침범을 받기도 했다. 나토에 가입한 이나라는 당뇨병 인슈린생산, 가구디자인,건축기술, 디젤엔진 조선업이 세계 제1위라고 한다. 
스웨덴과 덴마크간에 기차여행은 12Km로 이중 해저가 4Km이고, 8Km나 되는 다리를 통과 해야하는 육로로 이동하면 재미있는 여행이 될거라 생각된다.
 
비교적 성이 개방된 나라, 18세이상이면 동거도 묵인 하는 나라, 임신 3개월안에는 중절 수술도 가능하다는 이나라는 미혼모에게는 아동 보조금이 따블로 지원되고,이혼시 아이양육권은 어머니 측에 우선 한다. 성은 남녀 관계없이 사용가능하단다.그래서 그러한지 이혼률이 50%정도로 높은 편이며 맞벌이 부부가 많다 했다.
거리엔 대형 트럭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산업이 활발한 도시라는 느낌을 갖게된다.
노란색의 엠브란스가 자주 보였고, 자전거 전용길이 따로 나있으며 그 길에서 접촉사고가 일어나면 자전거에 우선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버스는 예정보다 1시간 늦은 밤 10시가 넘어서 “Quality Hotel”에 도착했다.
 
코펜 하겐, 티보리 공원을 찾아서
 
코펜하겐에서 하루밤만 더보내면 이제 필라로 돌아 가야 한다.
아침에 기상하니 어제 내리던 비가 그쳤으나 오전 날씨는 대부분 흐려 있었으며 구름 사이로 가끔 햇살을 드러내놓고 있는 폼이 많은 비가 내리지는 않을것 같았다.
아침 10시경 안내는 우리를“티보리 공원”으로 안내 했다. 


티보리공원은 코펜하겐의 중심가인 “스토이거리(=명동거리)”선상의 시청과 농협 협동 조합이 있는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호텔을 출발하여 티보리공원으로 가는 길양편에는 노란색의 건물에 붉은 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는 3층건물이 줄지어 있었고 자전차 전용 도로가 확실하게 구별되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보니 이나라사람들도노르웨이와 같이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국가에서 자전거 타기 장려는 국민 건강증진과 교통난 해소라는 두가 지효과를 한번에 얻을수 있는 현명한 국가 정책이란 생각이 든다.
 
버스 앞 창박으로 저 멀리 보이는 대형풍차가 한가로히 돌고 있는 것이 보여 안내에게 풍력발전소에 대해 물으니 이나라 풍력 발전소는 유명하다고 했다. 시가지 입구로 들어서니 가로등이 길 옆 전보대나 건물 벽을 버팀목으로 도로를 가로 질러 줄을매고 줄 과 줄을 중앙으로 연결하여 도로 중앙 위로 길게 수많은 전등을 달아 놓은 것을 보니 마치 한국에서 초파일밤 줄을 따라 길게 달아 놓은 전등불을 상상하게 된다.
도로의 교통량은 덴마크의 수도답게 많은 편이며 그중에 현대 자동차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나라에는 자동차 생산공장은 없지만 유명 브랜드의 부속만드는 공장이 번성하고있다고 한다.
 
 

시청 앞 광장
 
“티보리 공원”은 1843년에 만들어졌으며, 4월 부터 9월 까지 Open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성수기에 이공원을 찾아온셈이다.
 
버스에서 내려 “티보리 공원”을 가기위해 시청앞 복잡한 4거리를 통과 하는 동안 시청앞 광장에 주교 아세트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 것이 보였다. 기독교의 나라이기때문에 시청 앞에 종교인이 서있는 것이란 생각을 해 보며 카메라에 담았다.
 
 


티보리 공원 입구
 
공원입구는 마치 궁중입구 같이 웅장 했으며 벌써 많은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 서니 좌측으로 야외 공연 장으로 보이는 중국관이 눈에 띠었다.
 
   

*티보리 공원 내, 중국관    







            




                       * 티보리 공원내, 정원                  


* 티보리 공원내 호수
 
공원 내엔 한국관은 보이지 않았으나 중국의야외 공연장과 기념 정자 같은 시설물들을 통하여 장기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보급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여행지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전통 문화홍보는 중국이 한국에 훨씬 앞서 있슴을 느끼게 된다. 


이공원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창경궁 같이 일반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다.
이공원을 한바퀴 돌아 보는데 40분정도 걸렸다.
국내 관광객에게는 인기 있는 곳인지 몰라도 외국 관광객의 관광지로서는 그저 그런 곳이다. 모두들 늦은 아침을 한 관계로 점심은 오후 1시 전후가 좋을거리고 제의 했으나, 안내가 중국 음식점에 미리 예약해 놓았던 이유로 이른 점심을 주장하는 바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11.30분경에 점심을 해야 했다. 점심을 마치고 오후 1시가 못되어서 프레드릭 박물관 (Fredriksborg Castle)으로 이동 하기 시작 했다.
 
프레드릭 박물관(Fredriksborg Castle) 찾아서
 
일요일은 Free로 입장할 수 있다는Fredriksborg Castle로 가는 길은 제법 멀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코펜하겐에서 스웨덴이 있는 북으로 한참을 달려야 하는 것이다.
시가지 좌측으로 호수가 연하여 지속되고, 백조가 호수가에서 알을 품고 있는 한가로운 모습이 창박을 통하여 시야로 들어 왔다. 코펜하겐 중심부에서 15Km 떨어진곳에 한국 대사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가 달리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 부자들이 사는 부촌이라 했다.
이거리를 따라 길게 연결되어 있는 바다를 건느면 바로 스웨덴이라 한다.
이 바다의 특징은 깊지 않고 짜지 않다. 
북해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 물이기 때문이란다.
대신 이 바다는 바람이 많은편이라 했다.
 
바닷가에 동상이 다소곳이 서있는 것이 보였는데 이지역의 최초 여행자 “클룻”이란 사람이란다.
‘클룻’동상을 지나 바닷가엔 모래 사장 대신 넓은 잔디 광장에 흰색의 건물이 보였는데 “왕가의 여름 궁전”이란다. 이곳엔 사슴공원이 있고 왕의 사냥터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왼쪽에 성 하나 외롭게 서있는데, 왕가에서 사냥후 휴식처로 사용된다고 한다.
우측 바닷가엔 빨간 벽돌집에 흑색 지붕의 건물은 양로원이란다. 우리는 버스로 달리는 동안 안내가 지적하는 명소를 보기 위해 좌우로 바쁘게 눈길을 돌려 보지만 많은 명소를 미쳐 보지 못하고 노쳐버리는 곳이 많았다.
 
연이어 버스창문 을 통하여 보이는 왼쪽 흰색 건물은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요양소’라 하며, 동네 도서관도 보였다. 부자촌중에 부자촌이란 “웰백시”에 들어서자, 이곳엔 문선명 교주를 숭봉하는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문선명교주에대해 평가는 엊갈리지만 분명한건 국위선양에 지대한 공로가 있다는데는  대부분의견을 같이 한다. 계속해서 붉은 기와집 지붕위에 작은 동상이 보였는데  칼브릭스라는여류 작가의 박물관이란다.
그녀는 스웨덴  남자와 결혼하여 오랜세월 아프리카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한 작가라 한다.
 
부자촌을 지나고 철새들의 서식지를 지나 여우가 하도 많아 번식을 줄이기 위해 피임약을 뿌리기도 한다는 산림 지대를 지나서 덴마크 원주민들이 많이 산다는 “흠노백”이란  마을을 지나가게된다.
이지역은 늘 프른 잔디를 유지할 수 있어 일년 내내 골프를 즐길 수 있다 한다.
근 두어시간 가깝게 달려 오자 이번에는 누렇게 익어 가는 밀밭이 드넓게 펼쳐지는들판이 나타난다. 덴마크의 농촌의 진풍경이 바로 이런 것 이구나 라고 느끼면서 이 들판을  지나 어느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버스가 속력을 늦추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가 찾는 ‘프레드릭박물관” 에 거의 접근한 것 같다. 시간이 오후 3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우선 현지 식당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프레드릭 박물관(Fredriksborg Castle)
 
우리가 도착한 박물관은 현지에서 프레드릭 성곽(Castle)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제법 경비가 삼엄하여 큰 가방을 지참하고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절도를 방지 하기위한 사전 예방 조치 같았다. 박물관 건물 입구엔 덴마크의 상징인사자 3마리가 새겨져있고 돔으로 되어 있는 청동 지붕과 붉은 벽돌건물이 성곽처럼고풍을 풍기고 있었다.
성곽 주변에 아름다운 호수로 둘러져 있어 외부로 부터 침공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Fredriksborg 왕가  진입로                                 



                 Fredriksborg 왕가 광장
 
덴마크의  프레드릭(Fredriksborg) 왕가는 1560년도 프레드릭 2세 부터 시작 된다.
Fredriksborg Castle은 크리스티안 4세( King of Christion)가 왕이 되면서 1599-1615년 까지 16년간 왕실을 위하여 루네상스 양식의 우아한 성으로 건축한 것으로, 200여년에 걸쳐 이곳에서 7명의 국왕 대관식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프레드릭 6세는 이왕궁을 별장으로 사용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이왕궁은 1850년도에 화재로 파괴되어 버린다.
 
당시 왕궁에서 재정이 여의치 않아 수리를 못하자 궁중에서 전용으로 마시는 맥주‘칼스버거 를 제조한 맥주 회사 사장J.C.Jacobsen (1811-1887)이 이 건물을 사재로 수리하여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하겠다고 제의하자 이를 왕실에서 허락한다. 이런 연유로 제이콥슨이 왕궁을 보수하여 역사 박물관으로 만들고  당시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모든 초상화를 중심으로 궁중에서 사용하던 각종 귀중품들을 함께 전시하여현재와 같은 박물관으로 사용하여 오늘에 이른것이다.



 

Fredriksborg 왕가 관장에서 일행들과
 
경비로부터 안에서 사진 촬영시 후래쉬를 사용하지 말라는 주의를 듣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소작민을 대작민으로부터 해방시키는등 통큰 정치로 집권시 남다른 치세를 과시하던 프레드릭 6의거구의 대형사진이 입구에 버티고 있었다.  이사진을 지나 입구 경비를 통과하여 좀더 안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당시의 궁중의상이 전시 되어 있었다.
 

     
Fredriksborg 6세    
           
넓은 박물관 벽에는 사진들로 꽉 차있었다.
바다물을 끌어 올려 산업을 발전 시켜 궁전을 짓고 국가를 부강시키며60년간 통치 했다는 ”Chrition 4의 초상화도 곱게 보전되어 있었다.
 
어느방에 이르자 “프레드릭 6세”의 입체 그림이 입구사진보다 더 크게 그려져 한쪽 코너 벽을 완전히 차지 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곳에는 화재로 파괴된 궁중을 재정비해 놓은 맥주회사 사장 J.C.Jacobsen(1811-1887)초상화를 비롯하여 그가 수집보관 하던 사진과 개인 소장품들도 함께 전시 되어 있었다.
 






                   왕실 의상



궁중 안에는 아치형의 엄숙한 분위기을 풍기고 있는 왕족 성당과 화려한 대형 연회실이 우리들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했는데 돌로 섬세하게 조각된 내부 구조와 부조물이 조화를 이루어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Fredriksborg 궁중(박물관)의 왕족 성당

 


Fredriksborg 궁중의 연회실

 

 
  

그많은 벽화중에는 아동 동화 작가인 안델슨의 사진도 보였다.


특히 63의 숫다가 달려있는 방으로 들어서니 “독일과 3년 전쟁”을 그린대형 사진이한쪽 벽면을 덮고 있었다.이 귀한 그림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으나 너무 실내가 어두어 실패 하고 말았다.


맥주회사 사장 제이곱슨
 
그방을 지나 근대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방으로 옮겨 가자 점점 섬세하고 화려해 져가는 산데리아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유품의 가치도 달라보이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의 인어 공주
 
바닷가에 인어 공주를 보지 않고는 코펜하겐에 왔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말이 있을정도로 이도시에는 인어 공주가 유명하다.
이 작품은 1913년 맥주회사 사장 칼 제이곱슨(J.C.Jacobsen)이 안델슨의 작품인 작은 인어 공주를 주제로한 발레를 보고 크게 감동을 받어 바로 이 인어 공주를 코펜하겐의 상징물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조각가 “에드워드 에딕슨”을 시켜 코펜하겐 항구에 인어 공주 를 제작하게 하였다. 
 
그러나 각방으로 유명 모델을 구하려 애썼으나 적당한 모델을 찾지 못하여 당시 29세인 제이곱슨의 아내를 모델로 하여 제작 했다는 설이 있다. 바로 그작품이 현재 코펜하겐 항구에 남아 덴마크 사람은 물론 전 세계각지로 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이도시를 방문 할 때마다 한번은 찾는다는 명승지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다.

 코펜하겐의 인어 공주
 
어쨋든 우리가 Fredriksborg Castle(박물관을 떠나 인어공주를 찾아오기 위해지나는 시가지의 모습은 아름 다웠다. 
안델슨의 거리를 지나 우측으로 청동지붕에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만든 “크리스티안4 세” 여름 궁전 앞을 지나자 1920년 해군기지로 사용했으며 지금은 해군 가족들을 위한 거주 단지로 개발되어 있는 주택지라는 안내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나라의 군에 대한 복지 정책이 돗보였으며, 눈을 앞으로 도로가 맞다은  끝을 바라보니 많은쿠르스와 Ferry 그리고 작은 보트들이 정박해 있는 바다가 보였다.
그곳에 인어 공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인어 공주가 있는 항구로 접근해보니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가 바위위에 검게 그을린듯한 전라의 아름다운 여인이 인어처럼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청동상의 조각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방금 바다에서 나온 한마리의 인어가 잠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것 갖기도 하고, 애수에 젖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슬픈 여인의상 같기도 했다.
주위에는 많은 관광객이 기념 사진 촬영으로 붐비고 있어 제대로 비집고 들어가기가힘들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사람 구릅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새인가 인어 공주 주위에는 그많던 외극관광객을 밀치고 한인 관광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경우를 양화가 양화를 구축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지 모르겠다.
어쨋든 모든 작품은 그 의미를 어떻게 부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수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필자도 카메라에 인어 공주를 담았다.
 
그런데 인어 공주는 이곳에 제작된 이후 3번에 걸쳐 수난을 격는 사고가 발생했다한다.
첫번째는 1964년 인어공주의 머리가 없어졌고, 1998년에는 오른쪽 팔이, 1998년에다시 머리가 없어진것을 그때 마다 쓰레기통에서 찾아 복원해 놓았다. 인어공주는만인의 사랑만 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인어 공주를 저주 하는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아마 정신 이상자의 소행이 아닌가 생각 된다. 이 인어 공주는 작년에는 중국 세계무역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중국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단다.
 



동화 작가 안델슨
 
여기서 안내의 말을 근거로 아동작가”안델슨”의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안델슨은 1805년에 구두 수선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에는 노래를 잘하여 연극배우가 꿈이었다.
그러나 그가 11세때 부친이 사망하게 되자 교회 목사의 추천을 받아 왕립 극장에서막을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그는 70평생 세번에 걸쳐 어느 여인을 사랑했었다고 고백했다는데, 그중에서 오페라 여배우에게는 매부리 코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여행기를 쓰기도 했다는데, 동화 작가로서 아동을 위해 좋은 동화책을 많이 써국왕으로 부터 영예의 훈장을 받기도 했으며,  그의 동화집은 세상에서 제일 많이 판매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안델슨의 생가는 현재 박물관으로 되어 그의 생애의 모든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이지역에 안델슨의 거리가 있을 정도로 이나라에서 각별히 존경받는 세계적인 동화작가이다.
 
아메닌 궁전 (Amarienborg Slot)
 
아침 7시에 기상하니 날씨는 쾌청한편이다.
이제 오늘 오전관광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북유럽 일정을 모두 마치고 필라로 돌아가야한다.
어제밤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나 모두들 이국에서 마지막 밤을 늦잠만 자고 있을수 없었던지 일찍 기상하여 새벽부터 호텔 로비를 서성이고 있었다.
아침 10시, 우리는 덴마크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 하기 위하여 서서히 호텔을 출발했다.
 
이동하는 동안 안내의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덴마크 북쪽은 부자들이 많이 사는 부촌인데 반하여, 남쪽은 농민들이 많이 산다고한다.
예전에는 왕가가 북쪽에 있었지만 현재는 코펜하겐 중심부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여왕궁전 
                                                  

      왕자 궁전
 
현재 남쪽엔 돼지농가가 많아 오물 처리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으나 덕분에 오물 처리시설이 발달 하기도 했다. 돼지수가 인구의 5배정도 된다고 할 정도이니 상상이간다. 덴마크에는 잊어서는 않될 두 사람이 있는데 한사람은 동화 작가 안델슨이고,다른 한사람은 농민의 아버지라 불리는 달가스 라는사람이다.
 
 달가스는  2차대전이후 덴마크가 경제와 산업이 말할수 없이 황폐해 졌을때 토지 개량사업 및 토지매립 사업을 일으켜 경작지를 넓히고 경쟁력있는 낙농산업의 개혁을 일구어낸 장본인이 2차대전 당시 대령출신인 군장교 였다.
그는 덴마크가 불란서 편에 있었다는 이유로 영국의 보복이 심해지자 이들의 간섭에서 벗어 나기 위해 스스로 지질조사후 덴마크의 거친 토양에 맞는 밀, 보리등의 농작물을 재배를 장려 하는 한편 활엽수를 심어 바람을 막고 지속적으로 영농정책을 개선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농민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호텔에서 나와20분정도 지나니 코펜하겐 시가지 입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길옆으로 6층의 일정한 높이로 들어서있는 건물들이 필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였다, 특별히 6층 건물사이로 우뚝솟은 15층 정도의 높은 건물에 “메리옷 호텔” 간판이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미국 자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심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오른 쪽으로 화력발전소가, 그뒤로 선박이 보이는 운하가 길게 푸른 물을 흘리고 있었다.
운하를 가로 지르는 “크리불”다리 근처엔 왕립도서관이 보인다.
이 도서관엔 철학과 유대인에 관계되는 서적들이 많이 비치 되어 있다고 한다.
버스가 이렇게 시가지를 통과 하여 아메닌 궁전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메닌은  프리드릭 5의 왕비 이름으로, 프레드릭왕이 왕비의 이름을 따서 만든 궁전이 바로 아메닌 궁전 (Amarienborg Slot)이다. 궁전은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현재 덴마크의 여왕 “마르그레네 2세 “부부가 거주 하는 곳으로 건물중앙에 깃발이 꽂혀 있으면 집무중, 깃발이 없으면 공석중이다. 지난 6월 7일 한국을 국빈 방문한 이여왕이 분명히 방문을 마치고 덴마크로 돌아 왔을텐데
그날 깃발이 없는 것을보니 부재중인 모양이다.
궁전 입구에는 양쪽으로 한명씩 전투복에 착검한 총을 들고 초병이 근엄한 표정으로보초를 서고 있었다.
 
궁전입구를 들어서니 광장 중앙에 “프리드릭 5세”의 푸른색갈의 동상이 위엄있게서있었고, 동상을 중심으로 왕의 집무실, 귀빈을 접대하는 영빈관과 청동 둥군 지붕을 한 왕실의 교회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던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큰아들(프리드릭 10세)이 사는 곳은 붉은 바탕에 흰색갈의 십자가가 선명한 이나라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왕자가 집무중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차기 왕권은 현재 42세인 “프리드릭 10세”에게 전위 된다고 한다.
이곳을 나와 우리는 로슨 버그 궁전(박물관)과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슨 버그 궁전(Rosenberg Palace) 찾아서
 
로즌 버그궁전에 도착하니 이곳에도 역시 전투복에 베레모를 쓴 두명의 보초가 서있었다. 



로즌 버그 궁전 초병


안내가 입장 수속을 하러간 동안 일행 몇사람이 보초와 기념 시진을 찍기위해 조심 스럽게 접근한다. 겨우 포즈를 취하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보초가 서서히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빈번하여 포즈가 헛수고가 되어 버려 모두들 막장 대소를 했다.
 
 

2011년 6월 7일, 인천공항
도착한 덴마크 여왕 부부
 
현재 “덴마크의 여왕 “마르그레네 2세 “는 1940년 생으로 180Cm의 장신의 미인이다.
그녀는 영국 유학중 고고학을 공부 했는데, 졸업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옆에서많은 도움을 준 불란서에서 온 같은 유학생 남자와 연애하여 1968년 결혼하게된다.그리고 1971년 덴마크의 영왕이되었다.
그녀는 현재 오스트리아 며느리를 두고 있다. 
이나라 사람들의 열린 결혼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건물 입구의 색갈들이 제각각이어서 마치 무슨 산업 공장같은 느낌을 주는 건물 앞에 황실을 상징 하는 크라운 마크가 달려 있었고, 로슨 버그 궁전(Rosenberg Palace)이라쓴 두개의 긴 깃발이 기둥에 위아래로 길게 매달려 펄럭이고 있어 궁전인 것을 알정도로 겉으로 보기에는 허줄하기 짝이 없었다. 입구를 들어서니 오래된 건물이 박물관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입구에 박물관입구라 표시되어 있는 박물관안을 들어서니 각종 진귀한 보화들이 진열실에 가득했다.
진열실은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구분 되어 있었고, 예상외로 박물관 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로슨버그 박물관 입구 안내판
 
 
 
로슨버그 박물관내 보물들
 
이박물관 안에는 한마디로 역대 왕실의 보물은 다 모아 놓은것 같았다.
금으로 만든 작난감 병정, 그옆으로 궁중 와인보관 통이 비치되어 있었고,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각종 총기류, 값비싼 호박이 달려 있는 각종 장신구, 금으로 만든 식기, 순금더이로 만든 인간의 팔뚝을 비롯하여 가구,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왕이 타는 코끼리 안장을 비롯하여 금 칼집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옛날의 이나라의 금은 다 이곳에서 왕을 위한 장식품으로 쓰여진것 같았다.
 

 


박물관 안에 진열되어 있는 값진 보화에 비해 경비가 너무 허술하단 생각을 해보며 박물관을 나왔다.
오후 2시 필라로 돌아가는 항공기를 타기 위해 우리는 코펜하겐 공항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간 40여명이나 되는 대구릅을 안내하느라 수고한 하나여행사 조성종 사장의 노고를 치하드리고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아울러 여행기간동안 제한된 시간내에 한가지라도 더 보고 쓰려고 헬신키, 스웨덴의 스톡홀름, 노르웨이의 오슬로,플럼, 베르겐, 그리고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이르기까지 지역 마다 바뀌는 안내에게 하찮은 질문으로 괴롭혀도 내색 않고 자상히 답해 주던 안내에게 도 감사를 드리며 이제 아쉬움을 접고 11일간의 북유럽여행을 마감하는 인사를 해야 겠다.

북유럽이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여--- 

안녕!!
 
지하 전열장에 보관되어 있는 금칼집 

PS: 본여행기는 필자의 홈피(http://oylee.tistory.com)에 올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에 계제된 본여행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 들에게도 감사드리며,다음 여행기가 준비 되는 대로 다시 뵈올 것을 약속 드리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필자 이오영 올림